공지사항 NOTICE

[미술평론_김병수] 아직 산책이 가능한 이유

전시리뷰
작성자
koreagalleries
작성일
2021-07-10 16:04
조회
149
빈우혁, <프롬나드>, 갤러리 바톤, 2021년 6월 16일~7월 23일
김병수(미술평단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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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가 설치적인 영역을 모색할 경우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건축과 조각을 이어서 회화 속으로 들어가는 시선을 떠올릴 수 있다. 3차원적인 공간성에서 공공성과 예술성이 접속하는 건축과 조각은 거주라는 점에서 차이 가 나는 것일까? 그리고 회화는 이 둘과 다른 조망을 할 수 있는 영역일까? 빈우혁의 갤러리 바톤 전시 <프롬나드> 가 내게 촉발한 미학적 물음들이다.

인간이 걷고 본다는 것이 의미를 획득한 시기를 근대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 또는 회의가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산책은 특별한 종류의 노동이다. 발생 초기에는 노동이라고 인정될 수도 없었다. 결과로서 생산 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난의 대상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것이 우리가 속한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영역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여러 가지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댓가 없는, 무상한 행위로서 미적 관 조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유와 성찰이라는 이름과 동행하는 관계를 이룩하기도한 것이다. 산 책이 미학적 행위로서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때 만나는 것은 전통적인 자연이 아니다. 또 그렇게 구성되 어지는 세계는 현실적이지도 않다. 특히 빈우혁이 그리고 있는 회화-세계는 아주 구체적이지도 않고 추상적인 것 도 아니다. 이전의 전시에서는 구상적인 측면도 강했고 따라서 묘사를 통해 심리를 드러내려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2차원적 세계인 회화가 세계를 감당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변천을 거듭해오고 있는 중이다. 어떤 이념적인 방식을 취하기도 했고 상징물들을 장치로 사용하기도 했다. 가장 강력한 원근 투시도법이 여전히 우리 머리에 떠오르기도 한다. 역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내용의 미학은 시각적 형식보다 우위에 놓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이거나 이 데올로기적이었다. 이를 벗어난 자리에 눈속임이라는 비하를 받았던 트롱프뢰유가 위치한다. 그 지위를 역전시킨 주관성의 미학은 오히려 빛과 색의 과학을 택한 결과이다. 그리고 회화는 스스로 설치적 영역으로 들어가기도 한 다. 이게 가능한 것은 전시라는 구체적인 이벤트 덕분에 가능하다.

갤러리 바톤의 빈우혁 전시는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마침내 도달하는 하나의 방같은, 혹은 위에서 보면 하나 의 열쇠 구멍 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위를 둘러보게끔 회화 작품이 전시되었다. 숲이면서도 건축인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 전통적인 자연이면서도 거기서 벗어난 인공의 미의식이 겹쳐진다. 그리고 갤러리 관 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입구 쪽의 작품이 일종의 대응으로 놓여졌다는 것이다. 인트로이면서 안쪽 작업을 둘러보고 돌아보는 순간 만나는 응대는 일종의 순환 혹은 지속가능성을 떠오르게 한다. 상응 혹은 조응의 미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작업의 진열이 아니다. 건축적이고 촉각적인 것이다. 이것을 회화-전시가 어떻게 감당하는가는 항상 내게 주목거리이다. 빈우혁의 이번 전시는 그 점에서 거닐며 감상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정도면 대개 클로드 모네의 ‘수 련 연작’을 떠올리게 된다. 나도 외국의 다른 전시에서 이런 체험을 했었다. 모션 그래픽스에 대한 체험과 다른 점은 주관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속도와 시점을 본인이 조절하면서 본다는 것인데 이때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상태가 조건으로서 작동한다. 산책과 전시 관람이 서로 가로지르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도시의 근대 성과 전시의 미학은 거의 비슷한 성질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빈우혁은 삶의 거점을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고 이번 전시를 열었다. 환경이란 주체를 둘러싼 세계이다. 그래서 그의 존재 혹은 세계 교류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주의 결정은 이유가 다양하다. 그리고 물리적인 상황과 함께 심리적인 요인들도 그 자연에 담길 수밖에 없다. 즉 화가가 담아내고 그려내는 화면은 새로운 구상력 혹은 기 대하거나 희망한 지점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그의 회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회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묘사 적이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과정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분명 새로운 모색이 진행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체험과 의도 속으로 우리는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른바 추체험이다. 작가가 떠올 리는 자연과 그 구상력의 경과와 결과에 대한 반응은 작품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미적 체험은 공통감만이 아니라 공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상식은 보편적이라 여겨지지만 그 범주는 일치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문화적 보편 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주와 상상의 공동체는 다르다. 아무리 디지털을 통한 글로벌을 강조해도 온라인의 자연과 오프라인의 자연은 다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회화관은 이제 거의 유명무실하다. 문화적 유전 자를 언급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서유럽에 바탕한 근대 이후의 미술적 사유를 서울에서 그대로 수용 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아마도 이 지점에 빈우혁의 회화가 모색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거주 이전의 자유만큼 회 화적 사유 혹은 예술적 양심의 이동은 자유로울까? 어쩌면 예술적 주관의 새로운 구성이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공감의 미학이 성립하려면 정동적인 상태가 필요하다.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회화가 가능할까? 감정의 변 화를 일으키고 정화의 상태에 이르른다는 카타르시스의 미학은 고전적이지만 꽤 매력적이다. 우리가 눈물을 그 증 거로 내세우지만 그건 그저 상징일뿐이다. 구체적인 행위, 즉 정치적인 행동을 요구하기에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정동은 미학에서 절대적으로 검토할만하다. 이 때 빈우혁은 우리를 걷고 시선을 이동하게 한다는 점 에서 고려할 만한 작업을 진행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각의 조절을 가능하게 하거나 조건지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근원을 주관이라 부른다면 역설적이게도 실재와 감각, 객체와 성질이라는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빈우혁의 산책이 선사하는 회 화의 세계는 우리에게 실재로서 자연을 사변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

 

* 본 원고는 2021년 미술평단 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1986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창간한 미술평단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평론지로,
(사)한국화랑협회와의 협력을 통해 2021년 봄호, 가을호, 겨울호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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